


长安的荔枝 장안의 리치 마보융(马伯庸)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의 한 편린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역사적 사실과 사실 사이의 공백에 실제로 일어났을 법한 ‘가능성(可能性)’의 이야기를 촘촘히 채워 넣는 방식으로 독보적인 서사를 구축해 온 작가입니다. 그의 작품을 두고 ‘역사 가능성 소설(历史可能性小说)’이라는 표현이 쓰이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지요. '역사 가능성 소설'은 역사의 행간에 숨겨진, 실제로 존재했을지도 모를 그럴듯한 가정을 극도로 치밀하게 메워 넣는 그의 창작 방식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역사서에 '당 현종이 양귀비를 위해 매년 남방에서 장안까지 신선한 리치를 공수해 오게 했다'라는 기록이 존재한다는 건 이미 유명한 이야기지요. 그 짤막한 한 줄에서 마보융 작가의 '나오둥(脑洞·상상의 나래)'이 열립니다. 최근 메가 히트를 기록한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역사 속 엄흥도의 빈틈을 기발하게 포착해 내었듯, 이 작품 역시 정사(正史)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그 이면에 이런 거대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가능성을 독자에게 보여줍니다. 다소 기발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이 서사적 시도는 마보융만의 독보적인 스타일을 구축했으며, 역사소설의 외피를 두른 현대적 장르문학 같다는 인상을 받게 합니다. 특히 이번 작품 《장안적려지》는 직장인의 애환을 고스란히 담아낸 '당나라 버전의 오피스물'이라고 해도 무방해요. 책의 앞부분에 실린 역사학자 위겅저(于赓哲)의 서문을 참고하면 이러한 작가의 세계관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팬들이 부르는 작가의 별명 '마친왕(马亲王)' 역시 그의 압도적인 스토리텔링 능력에 작위를 헌정하듯 붙인 것으로, 그의 글에 얽힌 유쾌한 징크스와 팬들의 애정이 결합해 탄생한 독특한 문화라고 하더군요. 이 소설은 드라마로도 나왔어요. 소설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당나라 천보(天宝) 연간에 양귀비의 생일에 맞춰 신선한 남방의 리치를 5천 리 밖 장안까지 운송하라는 불가능에 가까운 황명이 떨어집니다. 상급 관리들과 눈치 빠른 동료들이 모두 몸을 사리는 가운데, 이 터무니없는 임무는 쥐꼬리만 한 월급을 쪼개 이제 막 장안에 내 집 마련을 한 9급 하급 관료 리산더(李善德)에게 고스란히 떠넘겨집니다. 실패하면 온 가족의 목숨이 날아갈 위기 속에서, 리산더는 오직 가정을 지키기 위해 당나라판 초특급 물류 수송 작전에 돌입합니다. 관료 조직의 냉대와 마땅한 전례도 없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 리산더는 수학적 계산과 치밀한 현장 실사를 바탕으로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는 극한의 운송 경로를 개척해 나갑니다. 그러나 물리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그의 눈물겨운 사투 뒤에는, 조정 권력자들의 이권 다툼과 하급 관리의 피땀을 쥐어짜는 거대한 제국의 모순이 도사리고 있지요. 단 한 알의 신선한 리치를 장안에 올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 가장의 목숨 건 생계형 밥벌이(稻粱谋)'가 촘촘한 고증과 장르적 긴장감 속에서 긴박하게 펼쳐집니다. 구차하고 고단한 밥벌이를 의미하는 '稻粱谋(도량모)'는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지식인의 자조와 냉소를 담아 오늘날까지도 자주 쓰이는 말입니다. 우리말로 치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라는 직장인들의 슬픈 한탄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거창한 영웅들의 역사 뒤에 가려진, 오늘날 우리와 너무도 닮은 평범한 직장인의 위대한 사투를 철저한 역사적 고증과 정교한 디테일로 잘 그려낸 이 소설은 황당무계한 판타지가 아닌 ‘정말 이런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생한 역사적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나아가 그 작은 리치 한 알 속에 얼마나 많은 소인물(小人物)들의 고뇌가 담겨 있는지, 그리고 그 이면에 얼마나 잔혹한 역사적 현실이 숨어 있는지를 날카롭게 드러냅니다. 문장은 원서 읽기 경험치에 따라 체감 난이도는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특히 이 작품은 문언체의 문장,당나라 시절의 생소한 관직명, 지명 등이 낯설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주인공 리산더의 치밀한 리치 운송 계산법과 당시의 도량형 단위, 그리고 풍부하게 사용된 성어(成語)들이 장벽처럼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원서를 읽을 때 모든 단어와 문장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넘어가겠다는 생각은 완독을 가로막는 지름길이 되기도 합니다.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일일이 찾아보기보다는, 앞뒤 문장을 통해 의미를 유추하며 맥락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큰 틀에서 문맥의 흐름을 따라가며 줄거리를 파악하는 느낌으로 가볍게 읽어가셔도 좋습니다 다만 이 작품의 경우 도입부 부분만이라도 역사적 맥락과 함께 연계하여 조금 촘촘히 읽어보시면 소설의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초반 归义坊, 平康坊, 永安渠, 曰生福报四分, 香积钱,贯,坊市制 등 같은 단어들은 배경 지식 없이 보면 그저 원서 읽기를 방해하는 '어렵고 낯선 고유명사'나 '옛날 단어'에 불과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읽기 여력이 닿는다면 이런 낯선 단어들을 그냥 지나치지 말고, 작가가 의도한 고증의 디테일과 우리의 현실을 대비하며 읽어간다면 훨씬 원서 읽기가 재미있을 겁니다. 역사적 고증과 문학적 디테일을 잘 살린 작품이니 중간중간 궁금증이 유발되는 단어들도 함께 살펴 읽으면 재미를 더 끌어올릴 수도 있겠지요. (이를 테면, 회를 먹는 장면이나, 당대 유행 놀이를 비유한 단어라든가...) ^^ |